충북보은 국립공원 속리산의 상징인
정이품송(천연기념물 103호)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목신제(木神祭)가 얼마전에 열렸다고 한다. 속리산의 상징인
정이품송이 노쇠현상이 역력하고, 최근엔 태풍에 가지를 잃는 등 수난을
격고 있으며, 정이품송은 1993년부터 현재까지 5차례에 걸쳐 10여개의 가지가
부러지면서 예전에 아름답던 옛모습은 잃어버린지 오래다.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 비석은 속리산의 내역을 기록한 것으로 현종 7년(1666)에 소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써서 법주사 입구에 세운 것이다. 내용은 속리산이 명산임과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 등을 적고 있다. 특히 수정봉 마루에 있는 거북바위에 대해서는 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있는데
중국인들이 중국의 재물이 우리나라로 들어 온다고 하여 그 머리를 자르고 거북의 등에 10층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을 효종 4년(1653)에 옥천 군수 이두양이 다시 머리를 잇게 하였는데, 그 후 충청병마절도사 민딕익이 관찰사
임의백에게 일러 탑을 헐어 버렸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당시 지식인들이 숭명사대(崇明事大)의
명분으로 불교를 억압하였슴을 알려주고 있다.
법주사 입구 수정교
수정교를 지나 법주사 가람으로 들어가기전
첫 관문인 금강문이 나옵니다. 단청을 새로 하는지 철구조물이
설치되고 보수중이라 아쉽게도 들어가지 못하고 우측으로 돌아갑니다.
사천왕문, 그 뒤로 금동미륵대불,
법주사 천왕문(天王門)
신라진흥왕 14년(553)에 처음 세워진 법주사의 정문이다.
그 후 몇 차례 다시 지어졌다가 조선 인조 2년(1624)에 벽암선사가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비교적 큰 규모이며, 지붕 옆면에 사람(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가운데 1칸은 입구이고, 양쪽 2칸은 사천왕상을 2구씩 배치하였다.
법주사 사천왕문의 사천왕상은 우리나라 최대의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팔상전(捌相殿)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捌相殿)(국보 제55호)은
사찰 창건 당시에 의신대사가 초창했다고 전하며, 신라 혜공왕 12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했으나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졌던 것을 1602년부터 사명대사(송운 유정)과 벽암대사에
의해 조선 인조 2년(1624)에 다시 복원된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1968년, 팔상전 해체중수공사 시
중앙의 거대한 심주(心柱) 밑에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팔상전 건립 경위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전각 내부에는 사방 네 벽에 두 폭씩의 팔상도(석가여래의 일생을 8단계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가
있으며,그 앞에 불단을 만들어 불상을 봉안하고 불상 앞에는 납석원불과 나한상이 있다.
통일호국 금동미륵대불
신라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7년간의 노력 끝에 금동미륵대불을 조성했다.
그 때부터 미륵부처를 조선조 고종 9년(1872)에 대원군이
경북궁을 축조함에 소요되는 자금마련이라는 구실로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해 갔다.
일제치하인 1939년에 장석상 당시 주지스님이
대시주 김수곤의 후원하에 김복진 조각가에게 의뢰하여
시멘트부처를 조성하던 중 약 80%의 공정상태에서 6.25동란으로
중단되었다. 1963년 박추담 주지스님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었던
박정희와 이방자 여사의 시주로 복원불사가 재개되어 1964년 5월에 시멘트
미륵부처가 완성, 회양되었다.
1986년 류월탄 주지스님 당시, 붕괴 직전의 시멘트
미륵부처가 해체되고 4년 뒤인 1990년 4월 청동미륵부처가
다시 만들어 졌는데, 기존의 시멘트불상의 크기와 형상을 그대로 복사해서
청동불로 바꾼 것이다.
2000년에 들어서 석지면 주지스님이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해서 국난극복과 민족화합, 2000년 한일월드컵
행사의 성공개최, 세계평화를 발원하여 청동녹을 벗겨내고 개금불사를
시작했다. 2년여의 노력으로 2002년 6월 7일 금동미륵대불 회양대법회를 갖게
되었는데, 원래의 금동미륵불을 복원한 셈이다. 개금방법은 건식전기도금공법으로 순금
3미크론 두께로 연도금면적 900㎡에 황금 80㎏이 소요되었고, 재원은 3만여 불자의 시주금으로
충당되었으며, 공사 연 동원인력은 총 4,500여명 이었다고 한다.
팔상전 지붕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풍경의 모습들...
팔상전(捌相殿) 앞에서 바라본...
(앞에)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과 (우측)약사전(藥師殿)그리고 법주사 전각들의 모습...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국보 제5호인 쌍사자석등은 신라
성덕왕 19년(720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10척에 이르는 8각석등으로 두 마리의 사자가 마주 서서
뒷발로 복련석 디딤하여 앞발로 양련석을 받들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자가 디딤한 복련석은 8각 지대석 위에 놓여 있으며, 양련석 주위에는 이중으로
연꽃잎이 조각되어 있다. 신라시대 석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신라시대
석조예술품 중 뛰어난 걸작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915호, 얕은 기단 위에 서 있는 중층인 이 건물은 신라
진흥왕 14년(553) 의신조사가 창건하고, 인조 2년(1624년)에 벽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총 120간, 건평 170평, 높이 약 20m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축물이다.
대웅보전(大雄寶殿)
우리나라 3대 불상전각이라 웅장히기 그지 없습니다.
(3대 불상전각 보은 법주사 대웅전, 부여 무량사 극락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사천왕 석등...
법주사 사천왕 석등
보물 제1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신라의 전형적인 팔각 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조각수법으로 보아 혜공왕(765~780)대에 진표율사가 법주사를
다시 고쳐 지을 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사석(불을 켜놓는 부분)은 팔각으로
사면에 창을, 나머지 면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였고, 지붕돌(석등의 위를 덮는 돌)정상에는
보주를 받치고 있는 받침이 남아 있다. 사천왕이란 불교에서 수미산을 중심으로 사방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동쪽의 지국천왕, 서쪽의 광목천왕, 남쪽의 증장천왕, 북쪽의 다문천왕을 뜻한다.
대웅보전(大雄寶殿) 내부에는...
앉은 키가 5.5m,허리 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소조불좌상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삼신불(三身佛)이 안치되어 있다. 중앙에 봉안한 불상은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다는 진여의 몸인 법신 비로나자불상이고, 좌측에 안치한 불상은
과거의 오랜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의노사나불(아미타불)상이며, 우측은 줄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화신으로 나투신석가모니불상이다.
대웅전에 있는 부처는 실내 안존불로서는 우리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이다. 세 부처를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우리 사람에게는 정신 즉 마음이 있고,
공부를 하면 지식이 있게 되는 즉 덕이 있고, 사람마다 제각기 육체를 가지고 있다.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이 셋을 포용하고 있다. 법당의 가운데 부처는 마음을, 왼쪽 부처는 덕을, 그리고 오른쪽 부처는
육신을 뜻하는 것이라 한다. 이렇듯 부처는 하나이지만, 우리 중생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세 몸(三身)으로
봉안한 것이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보살과 명부세계의
10대 대왕을 동시에 모시고 있는 전각으로 일반적으로
지장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 명부전의 주존불상인 지장보살은
중생이 죽은 후 고통으로 부터 모두를 해방시키겠다는 대원은 부처의 뜻과 같다는
의미에서 명부세계(지옥세계)의 구세주로서 이해 되어지기도 한다.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 등
세 신앙대상을 탱화로 모셔 놓은 복합 종교건축물이다.
보통, 독성각, 칠성각, 산신각을 따로 지어 각각의 탱화를 봉안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이지만 법주사는 한 전각에 같이 있다. 중국 도료의 칠성, 우리 고유 종교의
종교의 산신, 불교 고유 신앙 속에서 부처의 제자 중 독성 나반존자를 뜻한다.
명부전(冥府殿)에서 바라본
(좌측)원통보전(圓通寶殿)과 (우측)진영각(眞影閣)사이로 바라본 금동미륵대불의 모습...
뒤에서 바라본 쌍사자석등(雙獅子石橙)과 팔상전(捌相殿)
원통보전(圓通寶殿)
보물 제916호 평범해 보이지만 보물급 문화재 입니다.
앞면과 옆면이 각각 3칸인 정사각형 1층 건물로 중앙에서 4면으로 똑 같이
경사진 사모지붕입니다. 특이한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어서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이 모셔져 있다.
다른 각도에서 담아본 금동미륵대불의 모습...
가까이에서 담아본 금동미륵대불의 웅장한 모습...
법주사 희견보살상(法住寺 喜見菩薩像)
보물 제1417호 희견보살은 성불(成佛)의
서원을 가지고 몸과 뼈를 태우면서까지 아미타불 앞에
공양하는 보살로서 사람에게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강한 의지를
배양 하라는 뜻으로 조성한 것이라 한다. 이 보살상은 모루돌 위에 다기(茶器) 모양의
그릇을 머리에이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모루돌과 보살 그리고 그릇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얼굴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잘록하고 유연한 허리와 대조적으로 그릇받침을
받쳐든 양팔은 힘겨운 듯한 모습을 꽤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옷은 솟옷위에 가사를 걸쳤고 띠 매듭과 옷자락이 무릎 위에서 투박하게 처리 되었다.
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예술적 가치가 있는 희귀한 문화재이다. 전체 높이는 213m 이다.
법주사(法住寺)석연지(石蓮池)
국보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연지는 신라 성덕왕 19년(720년) 경에 조성된 것으로,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괴임을 만들고 다시 복련을 두른 굄돌을 올렸으며,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연지를 받치고 있다.
원래 이 석연지는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를 상징하며 화강석으로 조각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다. 높이 1.95m, 둘레 6.65m 이다.
법주사 마애여래의상(磨崖如來倚像)
보물 제216호, 높이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불록 새겨진 이 여래좌상은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의상으로 옆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하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상으로
알려주는 미륵불상으로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암벽에 새긴 불상)이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길고 큼직한 코, 둥근 눈섭, 뚜렷한 눈두덩, 꽉 다문 두꺼운 입술, 등은
길다란 귀, 삼도(三道)의 표현 등과 함께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넓은 어깨에 비해서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거의 수평적으로 처리한 조각 수법에서도 나타난다.
이 불상의 오른쪽에 오목 새겨진 마애조각은 선사시대 암각이라는 일설도 있지만,
의신조사가 불경을 실어오는 모습과 소가불법을 구하였다는 법주사의
창건설화와 관계되는 암각화로 추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