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산이야기

중국서안 화청지(華淸地)...

K신사 2012. 8. 19. 16:15

 

화청지(華淸地)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규모의 당나라 왕실 원림이다.

고대부터 수려한 풍경과 질 좋은 지하 온천수 때문에 역대 제왕들의

휴양지로써 각광을 받았던 장소이다. 화청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는데, 화청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는데, 일찍이 서주(西周) 시기,주유왕(周幽王)이 이곳에 려궁(驪宮)을

 지었으며,후에 진시황과 한무제도 이곳에 행궁(行宮)을 건립하였다. 특히, 당현종 천보년간에 건설한

 궁전 누각이 가장 화려하며 이때 정식으로 화청궁(華淸宮)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당시(唐詩)중에는

 화청지에 대한 묘사가 포함 되어 있는 시가 비일비재할 정도로 중요란 소재가 되기도 했다.

 

여산과 어우러진 풍경...

여산 케이블카가 보이고 산 꼭대기에 봉수대가 보인다.

화청궁은 안록산(安祿山) 의 난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5대10국 때

도교 사원으로 개축되었다. 청나라 때 강희제(康熙帝) 가 서쪽 지방을 순시할때

이곳을 지나면서 보수하도록 하여 당시 지어진 누대(樓臺)등이 남아 있다. 지금의 모습은

화재로 불타 없어진 것을 복원한 것이다. 양귀비에게 비운을 안겨준 안사의 난은 이곳을 지나면서

 화청지를 황폐화 시켰다 지금의 것은 예전의 7분의 1 정도만을 복원한 것이라 하니 당시의 화려함이 상상이 된다.

 

장생전

 

당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맹세 했던 곳...

 

칠월 칠일 장생전(七月七日長生殿) 7월 7일 장생전에서

 

야반 무인 화어시(夜半無人和語時) 깊은밤 사람들 모르게 한 약속

 

재천 원작 비일조(在天願作比溢鳥) 하늘에서 비일조가 되기를 원하고

 

재지원위 연리지(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천장 지구 유시진(天長地久有時盡) 높은하늘 넓은 땅 다할 때가 있건만

 

차한 선선 무절기(次恨線線無絶期) 이 한은 끝없이 계속 되네

 

이렇 듯 한날 한시에 같이 죽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현종이 양귀비에게 푹 빠져 정치를 소홀이 한 탓에 나라가 흐트러지고 결국

 안록산이 안사의 난 을 일으켜 궁지에 빠진다. 당시 서안에는 왕의 근위병 4천여명이

있을 뿐이였기에 현종은 서쪽의 사천성으로 도주해야 했다. 그들이 지금의 마위파 부근에 왔을 때,

이번엔 같이가던 호위병사들이 반란을 일으겼다. 호위병사들은 현종에게 양귀비를

죽일것을 강요하고 결국 현종은 사랑하는 양귀비에게 스스로

목을 맬 비단천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만경문을 지나 화청지에 들어가면 부용호 안에 핀 연꽃의 자태...

 

장한가 연극 무대 

 

옆으로 이동하면 구룡호(九龍湖)가 있고 호스 너머로는 다리와 정자들

그리고 전각이 서 있다. 낮에 관광객들이 걷고 있는 이곳이 밤에는 "장한가"

공연의 객석으로 변해 있었고, 앞의 호수와 전각과 정자들은 모두 무대로 변했다.

 

화청지(華淸地)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역사적인 러브스토리의 무대이다.

현종은 매년 10월 양귀비(揚貴妃)와 이곳에 와서 지내다가 연말이 되어서야 장안(長安)으로 돌아갔다.

양귀비의 본명은 양옥환으로 본래 현종의 아들인 수왕의 비였다. 며누리인 셈이다 그런데 자신의 아내인 무혜비가

죽자 시아버지란 체통을 만각하고 그녀를 후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도를 중시하는 중국에서는 매우

지탄받을 일이었는데 이를 무마하기 위해 현종은 일단 양귀비를 도교의 승으로

출가를 시킨후 다시 궁으로 불러 들이는 편법까지 동원했다.

 

서안에서 동북쪽으로 30km 떨어져 있는 여산(驪山) 자락에 자리잡은

온천지 화청지(華淸地) 중국 서안역사탐방여행 첫째날 오후에 찾은 곳은 바로 당(唐) 현종과

 양귀비 (楊貴妃 ,719~756)의 러브 스토리가 전해지는 화청지였습니다. 한편 서시 초선과 더불어

  중국의 4대 미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양귀비지만 지금의 미인의 기준과는 좀 달랐던 것 같다.

 

 당시 왕실의 시인으로 있었던 이태백은 양귀비에 대하여 허리가 굵어 몸매가 아름답지

 못하고 용모도 그리 신통하지 못하다는 내용의 시를 썼다. 이 시를 읽고 발끈한

양귀비가 현종을 충동질 하여 이태백을 먼 나라로 귀양 보내 버렸다.

귀양까지 보낼정도면 이태백의 시가 아마도 맞았던 모양이다.

 

또한 화청지에는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키운 연화탕,양귀비 전용

목욕탕인 해당탕, 그리고 궁녀 전용인 상식탕 등이 발굴되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밤 8시에 공연하는"장한가"을 중국돈 330위안을 주고 관람하였는데

밤에보는 화려한 조명과 함께 어우러진  무대는 한번 쯤은 꼭 볼만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호수 곳곳에 무대장치가 보이고 밤에는 여산에서 부터 주위에 모든 전각들이 조명 시설과 함께 화려함을

더합니다. 장한가는 당나라 때 백거이가 지은 장편 서 사시로 당현종과 그의 비 양귀비의 사랑을 읊은 노래이다.

 

장한가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부분은 총애를 받던 양귀비가 안록산(안산)의 난이 일어나 죽는 장면

 

둘째 부분은 양귀비를 잃고 난 후의 현종의 쓸쓸한 생활

 

세째 부분은 죽어서 선녀가 된 양귀비와 만나보는 장면으로 되어 있다.

 

화청지 입구 도로 변에는 탐스러운 봉숭아를 파는 상인들이 늘어서 있다.

 

병마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10 위안을 주고 기념찰영도 합니다.

 

함께한 일행들이 병마용 건물 앞에서의 기념찰영...

 

병마용(兵馬俑)

 

병마용이란 흙으로 빚어 구운 병사와 말을 가리키는데,

불멸의 생을 꿈꿨던 진시황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으로

  어마어마한 규모로 만들어진 상징적인 것이다. 세계 8대 불가사이로 꼽힐 만큼 거대한

규모와 정교함을 같추고 있다. 서안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약 30km, 진시왕릉에서

북동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병마용갱은 총 3개의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1 호갱은 당시 농민이 처음 발견한 것으로 장군과 병사가 배열대 있고,

2 호갱은 궁노병,기마병,전차병으로 구성되어있으며, 3호갱은 현재 발굴작업중이다.

 

이곳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74년 중국의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현히 발견되었고 현재에도 발굴이 진행중이다. 현재까지 3개의

  갱이 발견되었으며 700 여개의 실물 크기의 도용(陶俑)과 100 개가 넘는 전차, 40여필의 말,

10여개의 병기가 발굴되었다. 병기들 대부분이 실제무기이며 현재는 창고에 보과 중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도용들은 모두 제각기 다른 자세와 표정, 복장,

헤어 스타일을 갖고 있어 그 섬세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침 호텔 분수대 앞에 아름답게 피어난 연꽃도 담아봅니다.

 

머물렀던 호텔 앞 에서 오늘 올라야할 화산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화산(華山)은

옛날 서악(西岳)또는 태화산(太華山)이라 불렀다.

중국의 유명한 오악(五岳)중의 하나,섬서성 화음시(華陰市)

경내에 위치,서북에서 중원으로 나드는 문호이다.화산이란 이름은

산봉우리의 자연배열이 꽃 모양 같아서 얻어진 것이다.화산은 북으로 황하,

남으로 진령(秦嶺)에 의지해 화산여립(華山如立)이라 불린다.전반산체의 능선이

매끈하고 깍아지른듯 한 모습에 기이한 산봉우리들이 두드러져 웅장하고 장관이다.

그래서 화산은 기이하고 험준한 천하제일산(天下第一山)으로 불리운다.화산의 기이함은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옹근 화강암으로 구성된 데 있다.〈산해경〉에〈태화산은 사방에

솟고 그 높이 5000길에 이르며 10리에 뻗어있다〉고 기재되어있다.화산은 5개의 주봉(主峰)이

있다. 그 중 중동,서,남,세 봉우리가 제일 높다.

 

남쪽봉우리 낙안(落雁)은 태화산의 정상으로 해발 2160,5m이다.

낙안과 서쪽봉우리 련화(蓮花),동쪽봉우리 조양(朝陽)이 우뚝 솟고,그 그림자 황하

 물에 비껴 천외삼봉(天外三峰)으로 불린다.운대봉(雲臺峰),옥녀봉(玉女峰)이 그 곁에,

 그리고 36개의 작은 봉우리가 그 앞에 솟아 천만가지 기상을 자랑한다.

화산은 중화민족문화 발상지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