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과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1626년(인조 4년)에 본성을 축성하고 병자호란 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봉암성과 한봉성이 추가로 만들어지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그 임무를 담당하였다.
남한산성의 성문은 산세와 지형의 영향으로 한쪽으로 치우친 형상을 하고 있다.
따라서 그 중간에 암문을 많이 두어 활용했다. 남한산성에 있는 4대 성문은 밑에 홍예문을 두고
위에는 문루를 세운 것이다. 문의 규모는 남문이 가장 크고 다음 북문, 동문 그리고 서문의 순서로 규모가 크다.
문루는 모두 정면이 3칸이지만, 측면은 남문이 3칸, 북문 2칸, 동문 2칸, 서문 1칸으로 되어있다. 지붕은 모두 팔짝지붕
양성을 바르고 동문의 무익공 홀처마를 제외하고는 모두 겹처마의 초익공을 하였다.
좌익문左翼門(동문)
남한산성은 한강 유역이 내려다 보이는 서장대를 중심으로
주변 산능선을 따라서 석축을 쌓은 8㎞의 대표적인 조선시대 산성이다.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에 4개의 성문을 두고 있으며 좌익문(左翼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동문은 광주지역과 연결되는 성문으로 한반도 중부내륙지방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동문은 행궁을 중심으로 좌측에 위치하고 있어서 좌익문(左翼門) 이라고 부른다.
동문은 남문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가장 통행이 많았던 성문으로 광주에서 계곡을 따라 평탄한
길이 나 있기때문에 아마도 산성내 필요한 물자를 동문을 통해 공급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동문은
지형적인 이유로 계단을 쌓고 그위에 성문을 축조했기때문에 실제 우마차나 사람들의
통행은 남쪽편에 있는 제11암문을 이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좌익문左翼門문루...
남한산성에는 80여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며 많은 사람이
거주할 수 있을 정도로 수원은 풍부한 편이라고 한다. 지금도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데
산성내에서 자체적으로 식수를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은 전체적으로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대부분의 물은 동문 아래쪽에 있는 수문을 통해서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으며, 지금도 계곡의 수량은 풍부한 것으로 보인다.
동문에서 시작하여 좁은 성벽 사이를 지나 동장대터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이제 성밖으로 나가 벌봉으로 갑니다.
봉암성과 벌봉으로 가는 암문을 빠져나갑니다.
봉암성에서 본성(남한산성)으로
들어오는 암문과 뒤로 동장대지를 바라 본 모습...
남한산성의 노송 사이를 성벽 따라 걸어갑니다.
남한산성 일대는 수도권 최대 소나무 군락지로 알려져 있다.
다양한 모양의 소나무가 여기저기 군락을 이룬 모습을 볼 수 있다.
전승문戰勝門(북문)
남한산성에는 동, 서, 남, 북 4개의 대문이 있는데 북문은 병자호란 당시 성문을 열고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던 문이다.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에서 “천승문” 이라고도 하였다.
당시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의해 군사 300여 명이 북문을 열고 나가 청나라 군을 공격하였으나,
적의 계략에 빠져 전멸하고 말았다. 이를 "법화골 전투" 라 하는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있었던 최대의 전투이자 최대의 참패였다.
정조 3년(1779)성곽을 개보수할 때 성문을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 (戰勝門)이라
한 것은 그 때의 패전을 잊지말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선조 때의 기록을 보면 산성내에 동문, 남문,
수구문 총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 2년(1624)에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 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북문을 지나서 푸른 소나무 숲길과
(우측)으로는 성벽길 따라 연주봉 옹성이 바라보입니다.
연주봉 옹성으로 들어가는 암문...
연주봉 옹성의 모습...
잠실 롯대월드 방향을 조망해 본 모습...
우익문右翼門(서문)
서문은 산성의 뷱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450m)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서쪽사면의 급경사가 급해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은 산성의 초축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년(1799)
개축하여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 행궁터를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정치를 하는 곳인데
서문은 우측이 되므로 우익문이라 하였다. 서문은 인조 15년(1637) 1월 30일) 인조가 세자와
함께 이문으로 청나라 진영에 들어가 화의를 맺고 항복하였던 바로 그 문이다.
서문에서 연주봉 방향으로 바라 본 성벽의 모습...
우익문右翼門(서문) 문루를 성벽 위에서 바라 본 모습...
수어장대(守禦將臺 경기유형문화재 제1호)
1624년(인조 2)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수어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건물이며, 수어청의 장관(將官)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하부 구조는 자연석을 허튼층으로 쌓은 낮은 축대 위에 한 단 높여 다듬은 돌로 기단을 마련하고,
맨 바깥 둘레에는 8모 뿔대 주춧돌을 세우고 안두리기둥 밑에는 그보다 낮은 반구형(半球形)의 주춧돌을 받쳤다.
수어장대(守禦將臺)
청량산 정상에 자리한 수어장대 원래 이름은 서장대다.
남한산성 4개의 장대 가운데 중추역활을 했던 곳으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건축물이다.
수어징대 내부에는 무망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무망루라 함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격은
삼전도의 굴욕과 청국에 8년 동안 볼모로 잡혀 있던 효종이 귀국하여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후대에 전하여, 비통함을 가슴에 새기자는 의미에서 영조가 붙인 이름이라고 합니다.
지화문(至和門 남문)
남문은 성의 서남쪽에 있는 문이다.남문은 정조 3년(1779)에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되어 지화문(至和門)으로 이름 붙여졌다. 또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다.다른 문들처럼 문루와 홍예문으로 나뉜다. 남문의 홍예문은 높이 4.75m, 폭 3.35m, 길이 8.60m로
홍예기석 위에 홍예석 17개로 구성되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동문보다 기둥높이는
낮으나 건물의 전체 높이는 조금 높다. 현재의 문루는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때에도 이 문을 통해서 들어 왔다.
성벽길 따라 수어장대 방향을 지화문(남문) 문루를 지나면서 바라 본 풍경...
제2남옹성치
치는 성벽의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시설물 의 하나로 남한산성에는 모두 다섯 개의 치가 설치되어 있으며 이 중 본성에 4개
봉암성에 1개가 있다. 제2남옹치는 남장대 바로 앞에 설치되어 있으며 남한산성에 설치된 치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남한산성은 대부분 성벽이 굴곡이 심하여 치가 별도로 필요하지 않으나
남쪽은 지형이 완만하고 성벽이 약하여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설치하였다.